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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타자화 '악의 얼굴 : Face of Evil' 2017-02-12 16:02:48
그냥커피 조회3,185
제1회 창작 연극제 '창창창 : 모색 - 나쁜 정상' (창작의, 창작에 의한, 창작을 위한)
몇몇 극단을 중심으로 소규모 연극제 들 이 늦가을을 뜨겁게 하고 있다.
제1회 창작 연극제 '창창창 : 모색 - 나쁜 정상' (창작의, 창작에 의한, 창작을 위한) 참여작 '악의 얼굴 : Face of Evil'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가끔 연극을 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 익숙해지다 보니 극단이나 작가, 그리고 연출, 출연 배우, 스텝이 누구냐에 따라 연극의 재미와 수준이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페이스북 등의 SNS는 이 들의 좋은 연극을 놓치지 않을 기회를 부여해 준다.
두 달여 전부터 올라온 여러 페스티벌 중에서 눈에 들어온 연극이 몇 편 있었다.
'악의 얼굴'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은 연극이었다.
생각할 꺼리가 많은 연극을 올렸던 연출가의 작품이었고, 최근 눈여겨보고 있는 한 작가의 원작 영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럼 이 연극 안으로 들어가 보자.

연극 '악의 얼굴 : Face of Evil' 포스터
<모티프>
이 연극의 출발은 동명의 영화 '악의 얼굴'이라는 단편 영화에서 출발하고 있다.
영화와 연극 모두를 보고 나니 두 작품은 소재만 공유할 뿐, 전혀 다를 수도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오히려 연극 '악의 얼굴'은 동 연출가의 전작 연극 '리어 누아르'의 고민에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영화는 주인공 얼굴을 통해 '꼬리를 무는 악의 순환'을 다루고 있었다면, 연극은 '리어 누아르'에서 다뤘던 '절대 악과 선의 기준'을 연장 선상에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리어느와르' 리뷰 링크


영화 '악의 얼굴' 한 장면 중에서

<구성과 몰입>
'악의 얼굴'은 학원 폭력 이야기를 통해 선악의 모호함을 다루고 있다.
극은 3개 시간의 액자 구성 (이야기 속의 이야기) 방식으로 되어 있고, 출연하는 배역과 연출가의 인터뷰 형식 속에 과거 이야기들이 플래시백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극이 시작되기 전 연출가는 무대에 나와 소감과 주의사항 등을 전달하고 오퍼레이션 부스로 이동한다.
자리 잡은 연출가와 배우가 뜬금없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관객은 연출가와 배역을 맡은 배우의 실제 이야긴가 여부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최면에 걸리듯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며 극 중 3개의 시간 속으로 몰입되어 간다.

<프레임 안과 밖>
극의 에피소드 내에서, 배우 들은 연쇄살인범과 전범들의 악행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다.
무대 내의 투사된 이미지를 통한 브리핑 형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들이 고민하는 것을 스스로 이입하며 자문하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놀랍게도 비판하며 고민하던 배역 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혐오하던 그 '악행'을 저지른다.
무대 프레임 안쪽, 교실 창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피해 학생의 몸에 난 상처만으로도 끔찍한 폭행이 그려지고, 창 프레임 밖으로 피해 학생의 죽음을 웃으며 구경하는 아이들은, 그들이 벌였던 교실 속(프레임 속) 행동들이 무엇이었었는지 구분해 내지 못한다.
무대에 설치된 창 (프레임은) '악의 타자화(他者化)'를 구체화하며 보여주는 도구로 쓰인 것이다.
여기서 더 섬짓하고 놀라운 것이 있다.
관객의 뒤편 오퍼레이션 부스의 어둠 속에서 들리던 연출의 인터뷰로 일체화되었던 관객은, 객석 -객석은 일종의 프레임이다-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빌미로, 무대에서 벌어지는 '악의 얼굴' 들로부터 어느 순간 스스로를 비굴하게 타자화(他者化)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비켜서서 바라보고 있는 관객인 우리는, 무대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 들에 대해 아무 책임 없는 선한 사람 들인 것 마냥 말이다.

<봉준호, 마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는 정신지체를 가진 아들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어긋난 폭력적 모성애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자애롭기만 한 모성애로 비롯된 폭력과 살인이 선, 악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물어보고 있다. 그것의 대비를 통해 도덕이라는 틀을 비틀어 보고 있으며, 관객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비꼬았다.
영화의 첫 장면과 끝장면으로 이어지는 씬(scene)에서 엄마로 분한 김혜자의 춤사위가 나온다. 저것이 춤인가 싶을 정도의 무의미한 몸짓인 듯싶지만, 탱고 음악과 바람 가득한 언덕에서의 김혜자의 초점 없는 얼굴과 몽롱한 듯 홀린 그 춤사위는 엄마의 모성애에서 비롯된 악행이 수긍되는 강렬함을 준다.
연극 ‘악의 얼굴’은 어쩌면 그 영화 속 이야기 구조와 닮은 듯 보인다.
장난으로 시작된 괴롭힘. 그것으로 본능적 사냥의 쾌감을 맛본 아이들. 그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작은 괴롭힘 당한 아이를 자살하게 만든다.
가끔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나 추행 등이 밥 먹다가도, 화장실에서도, 옷을 갈아입다가도 부끄럽게, 아니면 치욕스럽게 플래시백 되듯이, 이들이 저지른 그 일들은 감추어 두었던 기억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불러내어진다.
‘마더’의 김혜자처럼 배역들은 막이 바뀌는 어느 순간 탱고 리듬에 맞춰 알 수 없는 춤을 춰 댄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몸짓이 마치 영화의 그것 같다. '마더'의 그 춤사위를 오마주 한 듯해, 둘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의 갈등을 같이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본능에 기인한 폭력과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를 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중에서

<악의 타자화>
선악에 대한 고민은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며 수많은 철학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주변에서 벌이지고 있는 놀랍도록 수많은 악행 들은 그런 철학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폭력적이고 처절하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들이 저지르는 행동의 선, 악 마저 구분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정당화에 있다.
요 근래 대한민국은 이런 일 들로 넘쳐나며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 마저 '선의로 한 행동'과 '범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까지 심각한 도덕의 상실에 이르른 것이다.
폭행당하는 아이를 외면한 극 중의 한 학생처럼, 비켜 서 있는 것은 악이 아니며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악을 타자화하고, 비켜서고, 모른 채 했기 때문에 우리의 대한민국은 오늘 이렇게 돼버린 것은 아닐까?
연극의 부연에서 이야기하듯 EVIL과 LIVE는 한 끗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보는 거울 속 우리인지도 모른다.
연극은 상연되는 내내 스스로 위로하던 악의 타자화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야말로 더더욱 묵직하고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연극 <악의 얼굴 : face of evil>
출연 : 서민균, 차영남, 김재홍, 박이건, 전범수, 서현우, 유윤주, 김희, 김건, 김현준, 이강한
연출 : 류성
작 : 양지모
무대디자인 : 정유정 (Yu Jeong Jung)
조명디자인 : 김민재 (Minjae Kim)
음향감독 : 이제형
조연출 : 박이건, 유윤주 (Youn Joo Yoo)
홍보 : 김유정
프로듀서 : 박현석
제작 : 극단 행
후원 : 307studio , 시선일삼

*플티리뷰단 이재열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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