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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복수는 내가 한다고, 말했죠? 헤카베의 마지막. 2017-03-23 15:53:34
파프리카 조회2,802

산울림고전극장의 마지막 작품이자 창작집단 LAS의 공연, 헤카베를 많이 기대했다.


헤카베가 옆을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가 굉장히 강하게 인상에 남았기 떄문이었고,

또 여성이 서사를 가진 극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대학로, 오프대학로, 그리고 넓게는 서을-경기도의 수많은 극장에 올라오는 극들 중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연이고, 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극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 여성은 보조하는 역할이거나 다른 남자 캐릭터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헤카베라는 극에 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성 중심의 영웅담이 주인 고전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소재를 택한 극단 LAS에 더욱 호감이 갔다. 예전 이 극단의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라는 극도 호평이었기에 더욱 믿고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연 보기 전 몇 컷의 공연 사진을 미리 찾아보았는데, 극의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무대 중간의 단상이 어떤 역할을 할 지 궁금했다.


극의 시작은 헤카베가 폴리메스토르를 찌르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트로이의 여인들과 함께 폴리메스토르를 칼로 찌르는 헤카베, 소리 지르는 폴리메스토르. 암전 후 트로이의 여인들이 칼을 휘두르던 곳은 재판장의 단상으로 변한다. 단상의 맞은편에 앉아 아가멤논에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며 방금 전까지 무대였던, 밟고 서 있던 바닥이었던 곳이 장면이 바뀌고 주인공들이 양 옆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 다시 단상으로 변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바닥이 책상이 되고, 책상이 바닥이 되는, 그런 것이 가능한 게 바로 연극의 매력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이, 아이, 아이에서도 재판이라는 방법으로 극을 풀어냈기에 일순 실망감이 든 건 사실이다. 재판. 두 인물의 상황을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기에 좋은 방법이다. 게다가 두 인물의 대립하는 모습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또 재판 형식의 극을 보니 기대감으로 곧추세웠던 허리를 편하게 이완시켰다. 흐음, 어차피 고전이기에 내용은 대략 알고 있고, 이를 보여주는 방법,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법이 궁금했기에 조금 더 편하게 극을 보았다.




헤카베와 폴리메스토르의 변론을 들으며 조금 지루해지던 즈음-실은 왜 헤카베가 본론을 빨리 이야기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관객은 헤카베의 변론을 듣는 것인데, 이야기 진행을 위해 그 전 내용까지 다 들려주니 오히려 재판이 조금 늘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멤논이 재판을 멈췄다. 암전. 그 후 재판이 재개된 것이 아니었다. 아가멤논이 헤카베를 만나러 몰래 온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부분부터 흥미진진했다. 각 인물의 대립관계, 또 서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앞으로 헤카베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감추어 놓고 조금씩 드러내는 장면. 이 장면이 있었기에 헤카베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가 갔다.



재판의 결과는 누구나 예상했듯이 헤카베의 사형으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헤카베는 부모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복수를 한다. 시련과 고난에 휩쓸리며 살아온, 한 때는 왕비였던 헤카베. 그녀의 마지막이 참 당당하고 멋있었다.



커튼콜이 따로 없이, 암전 후 등장인물이 단상을 둘러싸고 리듬을 쌓아 가고 헤카베가 등장해 플라멩고를 추며 끝난다. 빨간 불빛 아래 당당히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산울림고전극장이라는 주제로 네 편의 고전을 보았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우리와는 아예 다른 세대의 이야기이지만 아직까지 살아 숨쉰다. 그것은 고전을 현대에 맞게 각색하고 또 잊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이 우리네 이야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형들을 잘 각색하고, 또 우리 시대의 이야기와 어울리게 만들어 보여주는 시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산울림 고전 극장, 정말 좋았다.












- 플티 리뷰단 김은빈이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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