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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반원형극장, 태양은 가득히 2018-08-30 05:01:26
희극지왕 조회2,272

얼마 전, 재개봉한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의 첫 기획시리즈는 '빨간 피터들'이었다. '빨간 피터'하면 우리는 추송웅 배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데, 긴 역사를 가진 삼일로창고극장을 상징하는 작품이자 배우인 셈이다. 소극장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곳은 홍대 산울림소극장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삼일로창고극장과 달리 열악한 상황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 하다.


산울림소극장을 대표하는 작품은 당연히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허나 아버지 임영웅 연출에 이어 대를 이어 극장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임수현 연출의 대표작이라면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 시대가 달라져서 하루에도 새로운 번역극과 창작극이 수백 편씩 무대에 오르는 요즘, 굳이 꼽을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을 수도 있으나, 작년 여름 초연에 이어 올해 재공연을 올린 '이방인'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가진 작품이다.


이미 수많은 번역본이 있음에도 임수현 연출이 새롭게 번역과 각색을 맡았다고 하니, 이 작품에 들인 공을 짐작할 만 하다. 무엇보다 소설 자체로 명작 반열에 오른 작품을 희곡으로 재가공해 무대에 올리는 작업은, 도전해볼만 하지만 잘해야 본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품을 본 소감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좁은 극장을 울려댔지만 좁은 반원 극장 무대, 태양이 지-잉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몸은 서늘한 와중에도 습도가 낮은 메마른 알제리 바닷가 어디쯤 태양을 피할 때 없는 외딴 어디쯤에 와 있는 듯 했다.


앞서 몇 번 말했지만 산울림소극장 무대는 좁은 주제에 반쯤 원형이라 무대 세트 설치가 거의 불가능하다.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궁합이 잘 맞을지 모르나 웬만한 작품을 올리기에는 까다로운 편이다. 나는 괜한 불편함이라고 생각해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허나 고민의 산물로 자연스럽게 맞춤옷을 입듯 공간을 충분히 이해하고 올린 작품을 만나면 변두리 골목 어디쯤 있는 작은 맛집을 들르듯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전박찬 배우를 '에쿠우스'의 알런으로 기억하는 세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 앞서 좋은 배우들이 워낙 많았다. 근래 말에서 떨어지듯 추락하는 중이나 조재현 역시 알런으로 오래 기억에 남고, 무엇보다 70년대 강태기 배우를 최고의 알런으로 꼽는다는 부모 세대의 평가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면 뫼르소라면 전박찬 배우가 단박에 떠오를 만도 하다. 연극이 끝나고, 객석 인사를 할 때 그가 얼굴에서 흘리는 땀과 살짝 고인 눈물은 비유를 하자면 얼음이나 차가운 돌이 흘리는 땀처럼 보였다. 매우 이질적인 감상이나 내가 볼 때는 그러했다.


소설 자체가 그렇지만 3인칭 방백으로 작품 전체를 설명하면서 문학적 혹은 현학적인 문어체 대사를 스스로 일정 수준의 긴장감 유지하면서 감정을 과하게 쏟아내지 않는 뫼르소는 단연 소설의 그것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무대가 좁으니 움직임에도 제약을 받고 소도구 하나 옮기는 동안에도 암전을 줘야하니 감정을 이어가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을 법한데, 다시 말해 연출이 과한 무게를 한 배우에게 짊어지게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감당해냈다. '에쿠우스' 알런 역도 만만하지 않으나 어찌 보면 정 반대의 의미로 감히 도전장을 선뜻 내밀 배우가 많지는 않아 보인다. 거친 연기가 자연스러운 정나진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종종 뵀던 박윤석 등 중견배우를 비롯해 작은 역할이 아까운 문병주, 자체로 도발적인 강주희 등 젊은 배우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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